위대한 개츠비(f. scott fitzgerald) : 왜 위대한 작품이 되었나?

곽재률 2021. 3. 24. 19:26

 

세계적인 고전들은

책 영문 이름 뒤에, analysis를 붙이면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위키 문서를 들어가서도, 그 작가,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이나, 메타포나 상징물에 대한 정보를 많이 준다.

또 책에 있는 문장만 그대로 쳐도, 그 문장에 대한 해석이 좌르르르륵 나온다.

 

당연히 박사, 교수님들, 전문가들이 쓴 논문도 많다.

굳이 내가 써도, 그것보다 분석을 잘 하거나, 더욱 의미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시대나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이나, 스토리 소개보다는,

다른 사람의 해석을 보기 전에,

왜 게츠비가 위대한가, 왜 재밌게 읽었는가에 대해 느낀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난 이 게츠비가 왜 위대한지 몰랐고, 군대에서 처음 읽었을 때,

왜 미국문학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 몰랐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단추는

게츠비는 왜 위대한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다행히, 작가는 닉 캐러웨이를 통해 책의 첫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주문한다.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히히 좀 열심히 썼다!! 시작!

(다 쓰고 나서 검색하다 느꼈는데, 물론 해석에 정답은 없겠다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리뷰들이 너무 많다. 

구글 상위 리뷰 중, 뉴스 칼럼으로 쓰든 블로그든 다양한 시야의 안타까운 리뷰들만 보였다.

그래서 세상을 잘 표현하는, 이 책이 더욱 높이 평가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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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꼭 알아야 할건, 작가가 이 제목을 붙히는 것을 매우 고민하고, 계속 다른 제목을 붙이려 했다는 것이다.

The great 는 우리나라의 위대하신~ 처럼 뜻이 아예 반대인 중의적인 표현으로 쓰인다고 한다.

나무위키 캡처 : 요약하자면, 작가는 제목이 마음에 안들었고, 아쉬워했다는 내용.

즉 여기서, 독자들이 게츠비를 해석할 때,

고의적으로 불륜을 일으키는 것, 또는

돈을 벌기 위해 밀주와 채권 사기 등, 비도덕한 행동조차 위대함을 도출해내기 위한 상징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억지 해석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위대하지 않았다라는 풍자의 해석은 더욱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커러웨이의 깨달음으로 게츠비를 서술하는 것이 이 소설인데, 게츠비가 그저 풍자의 해석임은 말이 안된다.

소설 안에서, 게츠비는 위대하다까지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닉 캐러웨이는 마침내 게츠비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소설의 초반부와 후반부를 관통한다.

책 초반 부분 : No - Gatsby turned out all right at the end;  it is what preyed on Gatsby, what foul dust~

차 사고가 있고 난 후 게츠비와의 마지막 대화 :

"They're a rotten crowd," I shouted across the lawn.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특히 캐러웨이는 이 말을 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진심인 칭찬이었기 때문이다.

캐러웨이에게 어떤 점이 게츠비를 나머지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게 했을까?

 

희망을 끊임 없이 바라보았다는 점?

목적을 어떻게든 달성하고자 하는 열정?

밀주나 채권 사기라도?

남의 여자를 뺐을려고 불륜을 저지르더라도?

작가는 돈이 아닌 사랑을 추구함에서, 가치의 상대적 위대함을 말하는 건가?

그저 노력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동경과 한계로써?

 

한 속물로 보이는 여자를 온 몸을 바쳐 사랑한다는 것이,

밀주와 채권 사기, 가정 파괴까지 용인된다는 걸까?

 

작가는 독자들이 최대한 넓은 이해심으로 볼 것을 작품 제일 첫 문장으로 주문한걸 기억하자.

21세기 현재 우리 시점에서, 톰과 데이지는 인간 말종이지만,

각자의 사정을 보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

부유한 집, 좋은 대학, 재즈의 시대, 방탕하게 놀고, 애인을 만드는 것에 전혀 죄의식을 주지 않는 사회

신흥 부자들이 치고 올라오는 사회 안의 보수적으로 되는 톰.

좋은 가문, 우수한 외모, 사교 시즌, 매일 줄을 서서 데이트를 청하는 괜찮은 남자들, 당시 여성의 위치,

그에 반해, 전쟁터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연인, 결국 톰과 결혼 하지만, 톰이 바람을 펴도 방도가 없는 상황의 데이지.

이런 도덕성이 희미해진 환경에서 누가 톰처럼, 데이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작가는 핵심 인물들이 가진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환경을 보여준다.

 

이런 캐러웨이의 무한할 것 같은 이해심 속에서, 판단의 보류 속에서, 

캐러웨이는 게츠비의 어떤 점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그를 가치있는 사람으로 칭찬하고, 그 외 주위 사람들을 비판했나.

삶을 지탱하던 아버지의 교훈을 버리고,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을까?

 

 

 

 

 

난 그 이유를 아메리칸 드림의 진정한 본질을 게츠비가 보여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게츠비는 등대의 장면에서 처음으로 미국을 발견한 개척자로 묘사된다. 

대놓고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시킴으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본질은 무엇인가?

미국가서 돈을 왕창 버는 것? 그럼 왜 돈을 벌려 했나?

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구 시대의 세습과 계층에 아래에서 불만을 품고,

돈을 벌어서 행복한 삶을 위해 신세계로 모험을 떠난 모험 정신이다.

돈은 그들에게 그런 구시대의 억압에서 벗어날 효과적이고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이제 게츠비는 무엇을, 왜 쫓았는가? 데이지를 쫓았다.

그럼 데이지는 어떤 상징성을 가지는지, 데이지를 쫓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일단, 데이지의 목소리는 참 가지각색의 매력으로 책에서 묘사된다.

결국 이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게츠비가 직접 말한다.

"Her voice is full of money", he said suddenly."

돈은 자본주의에서 가지각색의 욕구로 변할 수 있어서, 자본만능주의가 더욱이 만연할 수 밖에 없다는 칼럼이 생각났다.

목소리는 돈 처럼, 의식없이("indiscreet") 사람을 여러 모습으로 매혹적으로 끌기도, 상처주기도 한다.

또 데이지는 좋은 가문의 전형적인 매혹적인 여인이다. 하루에도 수 많은 데이트를 즐기는 인기를 가졌다.

무일푼 장교였던 게츠비는 그녀를 보고 매력적이라 느꼈고, 집과 그녀의  분위기에 감탄했다. 

그는 백만장자인 척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같은 층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그녀에게 주었고,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럼 데이지는, 1. 돈 많은, 2. 좋은 가문, 3. 젊은, 예쁘고 매혹적인 외모(사람이 가지는 욕망) .

이 세 가지로 게츠비의 모든 큰 야망을 접게끔 한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는 엄청나게 돈이 많은 신흥대부호였고,

그 많은 돈이면, 다른 더 좋은 가문과 결혼할 있고,

더 빼어난, 젊고 예쁜 매혹적인 외모의 여성도 많을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동시에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또 데이지가 아주 부자이고, 아주 좋은 가문, 아주 매혹적인 외모로 까진 묘사되지 않는다. 

그의 능력이면 다른 더 좋은 여자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데이지인가.

게츠비, 자세하게는 데이지를 사랑하는 게츠비에서

캐러웨이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고, 이 전의 가치관을 깨뜨렸는데,

데이지는 이 세 가지의 상징물이 될 뿐이면 다른 더러운 먼지로 묘사되는 주변 인물들과 다를게 없다.

돈과 안정을 추구하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는 톰, 데이지와 다른점이 뭔가?

같이 욕망한다는 것에 가치를 다르게 둘 수 있는 다른점이 뭔가?

 

확실히 이해하려면, 차 사고 이후, 캐러웨이와 게츠비의 대화에서,

그와 데이지의 첫 만남을 캐러웨이에게 이야기 해주는 부분에 답이 있다.

차 사고 후, 개츠비는 혹시나 톰이 데이지를 폭행하지 않을까, 밖에서 망을 보면서, 캐러웨이에게 드디어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장면.

이 부분은 작가의 엄청난 천재성이 돋보이는 구절들이다.

사람을, 세상을 잘 표현했다.

게츠비는 캐러웨이에게, 진실로 그가 본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가구, 인기많고 이쁜 외모의 여인과 데이트 할 때의 기쁨을 말한다. 이 회상은 정말로 많이, 자세한 묘사로써 부의 신선함을 표현한다.

이건 독자들에게 절망을 준다.

게츠비가 뭔가 부, 가문, 외모 그런 것들과 뭔가 동떨어진, 초월적인 위대함을 발견하려하는 우리에게,

그저 부, 가문, 외모의 신선함을 맛본 게츠비를 보고 끊임없는 덫에 빠졌구나라는 생각만 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많은 욕망이 결합된 사랑, 사랑은 욕망을 투영시키고, 계속 망상만을 덧칠해서 의미없이 쫓은 자의 최후.

이러면 이 소설은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고,

캐러웨이조차, 망상을 쫓는, 그 열정과 모험을 다른 가치보다 높이 사는 자 밖에 되지 못한다. 

여기서 위대함을 찾는 건 아주 난해해진다.

 

고전은 세상을 잘 반영해준다.

게츠비는 정말로 그녀가 주는 부와 좋은 가문, 예쁜 외모와 그 처음보는 신선함에 그녀를 사랑한 것이 맞다.

정말로 이것들 때문에 반하고, 그가 없었고 열망하던 것, 신선함을 보여 주는 그녀에게 빠진 것이다.

하지만, 게츠비는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I can't describe to you how surprised ~ what I was going to do? 이 문단을 보면,

매 분마다 점점 더 사랑하게 되어서,

그가 바라왔던 야망 따윈

그녀에게 밝은 미래를 얘기하는 시간에 비하면 아무 소용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는 매우 숨겨 놓았다. 이건 세상을 아주 날카롭게 반영한 것이다.

이건 세상에도 매우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탁월함이나, 월등함, 좋음에 사람은 반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면 결국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 하는 것은 결국 어떤 월등함 보다도, 그 사이의 숨겨졌던, 인간의 연약한 부분이다.

 

게츠비는 그녀가 감기에 걸렸을 때 무엇보다 매혹적으로 보았다.

이 부분이, 물질적인 묘사와 겹쳐나온다, 사랑에 대해 작가는 감기를 이용해 미세한 힌트를 준 것이다.

게츠비는 자연스럽게 이해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연약함을, 인간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She thought I knew a lot because I knew different things from her...

이 differnet things가 게츠비가 그녀에게 찾은 그 어둡게 숨겨진, 연약한 면이다.

다른 남자들은 그 면을 아 속물이네, 나쁜 점이네, 고쳐야 하겠네, 이렇게 치부했겠지만

게츠비는 데이지의 그런 면을 확실하게 이해했던 것이다.

 

이 연약함을 이해한 게츠비는, 사실 특별하거나, 탁월해서 그런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작가는 앞서 게츠비의 청년기를 통해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매우 야망적이었고,

여자를 이미 알았으나 여자를 무지하거나, 히스테리하다고 판단해 경멸했다.

그는 항상 기회를 노렸고, 결국 부자의 보트를 구하고, 그 밑에서 같이 조수로 여행을 하며 배우다가,

부자의 아내의 계략으로 부자에게 약속받은 상속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가 데이지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던 것은,

그는 데이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데이지의 연약한 부분 뿐만 아니라,

데이지를 통해 야망을 맹목적으로 쫓던 자신의 연약함을 확인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야망을 쫓아봐서 오히려 그 것을 빨리 느꼈을지 모른다.

 

게츠비는 그런 연약함에 불구하고, 그런 연약함 조차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점으로 보이는 연약함 때문에 더욱 사랑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앞서 소개했던 개척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의 본질과 연관지을 수 있다.

그 꿈은 본질은 돈을 왕창 벌고, 돈이 보장하는 인간의 욕망만을 끊임없이 추구하겠다는 꿈이 아니었다.

그 꿈은 귀족사회에서 보여진 돈으로서의 끝 없이 굴러가는 그 허무하고 끝없는 욕망의 굴레서 벗어나,

하나의 신대륙과 거기에서의 빛나는 미래를 꿈으로, 행복한 삶을 목표로, 모험을 떠난 개척자이다.

하지만 1.돈 2.구시대, 3.사람의 욕망을 증오하거나, 부정하거나, 그대로 따라해서 똑같이 반복하겠다는 것이 아닌, 

그것들마저 사랑하고, 이해함으로써, 더욱 잘 다루겠다는 각오로 떠났던 것이다.

구 시대보다 더 나은, 새로운 행복한 삶을 위해 모험을 떠나는 개척자인 것이다. 

 

이로써 캐러웨이는 게츠비와 다른 주변인물들간의 차이를 발견한다.

게츠비가 처음 떠난 개척자들로 대변된다면,

그 외 주변인물은 신세계에서 구시대들이 하던 것을 그대로 반복하던 그 당시 가치관과 사람들이다.

어떤 가치를 위한 모험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생 유지와 여러 욕망 위를 어지럽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개척자들의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써 꼭 필요했던 돈이

여러 욕망들로 변할 수 있는 돈의 모습에 현혹되어 결국 목표가 돼

구시대의 잘못을 반복하는 당시 상황, 변질된 개척자의 정신을 캐러웨이는 깨달은 것이다.

 

게츠비는 이 소설에서 그 누구보다 욕망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그 욕망은 수 없이 변하는 것이 아닌, 매우 점진적이고 조심스러운, 오래 바라온, 하나만을 위한 욕망이다.

그저 편안한 삶, 그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무한히 변하는 삶은 오히려 매우 정적으로 보인다.

이 아이러니함 조차 세상을 잘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이 욕망의 덫을 잘 표현해준다.

무한하고,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의 추구가 오히려 아주 합리화 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는

단 하나의 욕망을 쫓은 게츠비는 오히려 어지러워 보이고, 욕심으로 가득 찬 이상주의자처럼 보인다.

 

게츠비는 비록 돈과 구시대, 사람의 욕망을 대표하는 세상에 의해 죽음을 맞이 했지만,

그의 죽음은 캐러웨이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준 점에서 완전히 헛되지 않은,

하나의 캐러웨이의 성장 소설이다.

이로써 캐러웨이는 이 동부에 환멸을 느끼고, 채권을 배우는 것을 접고 

서부로 떠나서, 이 경험으로 위대한 게츠비를 쓴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닉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강물로 비유하고,

현재 1920년대가 구 시대의 끊임없는 욕망을 탐했던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흐름을 보고,

이것을 거슬러, 신세계를 찾아 앞으로 나아갔던 그 개척자들과 같이

그 흐름에 거부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를 촉구하며 소설을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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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점.

 

나도 만약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 책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한 남자의 불타는 사랑과 1920년대의 인간미 없는 사회 정도로 읽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정말 사랑을 해보지 않고선, 이것을 정말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한 설문조사에서, 20대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은 데미안, 30~40대는 개츠비, 50대~는 조르바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전이라는 말만 듣고 읽긴 하지만, 속의 의미를 파악하는 건 뒷전으로 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고전에서 나오는 핵심과 그 요약을 간단히 알아가는 것도 도움은 되겠으나,

직접 도출하고 사고하는 것이 더욱이 재밌는 고전의 재밌음인 것 같다.

나도 내 기준 이정도의 분석을 글로 쓰는 것은 처음이라, 작가의 의도가 전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핵심만 얘기하려 했지,

수려한 문체와 여러 상징들이 존재하고, 일단 확실히 재미있다.

특히 게츠비와 데이지의 재회는 아직도 상상하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작년에 좋은 친구와, 어떤 영화를 봤던 것이 생각난다.

이 영화에서 커플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않고,

여러 다른 이성과 만나는 것을 약속하고 욕망을 더욱 채우고 사랑하기로 한다.

그 때,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난 전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고,

엄청나게 우울해졌다. 

왜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 곳으로 가고, 또 나타나면 가고, 또는 아예 다 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거지?

마음은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지만, 전혀 설명되지 않는데? 그저 내 고정관념인가

하지만 이 소설이 이제는 좋은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끝 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람은 논리적이지 않게, 고집부리고, 논리적이지 않게, 모든 걸 사랑해야 사랑할 수 있다.

그 논리적이지 않은 마음의 내제를 사랑으로 부르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이 명작으로 쳐지는 것은

작품에서도 이 가치의 차이가 잘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현실, 세상과 닮았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많은 해석의 여지를 줬지만, 하지만 그래도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는 명확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생각하기 복잡하고, 찾기 힘들뿐. 그 조차 세상과 닮았다. 이 가치는 매우 가려져있다.

이 의도를 알기 쉽게 설명했거나, 보여줬다면 명작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잘 확인 되지 않음으로써, 현실과 같음은 방식으로써, 더욱 생각해보게 되고, 찾은 답은 진정으로 와닿을 수 있다.

 

 

 

 

 

 

사실 철학 사조를 조금 아는 사람은, 캐러웨이의 첫 마디부터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에게 확실한 진리나 가치는 없다는 이 사고는 어떤 가치나 욕망을 추구해도 상관없다는 것으로 전환되곤 한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부상

그 전에 인류가 공들여 쌓았던 초월적인 존재와 가치, 도덕성, 신과의 대립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이에 관한 많은 상징들이 존재 하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하지 않으려 한다. 각자 생각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

 

또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실존적 불안과 대중화를 생각해볼 수도, 

 

진화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타인과 사랑할 때, 타인을 알아갈수록 완벽하진 않으니

사람의 감정은 그 지속을 위해 부족한 면을  결국 사랑하게 되도록 진화되었다라고 볼수도,

 

진정한 사랑과 삶에 대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수도,

파우스트의 무한한 자기 실현과 무한한 자기 체념에 대해,

무한한 자기 개발의 공허함에 대해서도,

현대사회와 이 당시를 비교할 수도, 데이지와 조던의 여성학적 측면에서 그 시대의 여성을 변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어 원문 책에 매우 이쁜 글씨로 글을 쓰고, 밑줄을 긋고 공부한 흔적이 있다. 덕분에 정말 많은 힌트를 얻었다.

3학년 땐가, 헌 책 방을 우연히 들러 산 건데, 이제야 읽고, 새롭게 다가왔다.

이 분에게, 또 그 때의 나에게, 사랑을 알려준 사람에게 감사하다.

이 걸 쓰는데만, 꼬박 한 달 넘게 걸린 것 같다. 다 읽은 건 4주전에 다 읽었었다.

미리 해석이 생각나서 쓴 것이 아니라, 계속 왜 그렇지? 하면서 글을 써갔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에서의 특별한 가치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너무 고민했는데,

감기라는 단어가 너무 도움이 되었고, 그 이후로 쭉쭉 써졌다. 이 날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뭐 누구에게는 한번 읽고 바로 도출할수도 있는 것, 또는 당연한 생각이겠지만,

 

나에게는 처음인 꽤나 재밌는 모험이었다! 끝!

 

또, 위대한 게츠비 영화의 테마곡. young and beautiful은 이제야 주제를 관통하는 걸 느낀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이쁘지 않아도, 상처받은 영혼 말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게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