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전집 논쟁
18년도에 칸트 전집 중 일부가 출판되면서 논란이 생겼다.
그 당시, 나도 마침 철학에 관심이 생겨, 철학과 전공 필수 수업인 "근대서양철학"을 들을 때였다.
그래서, 이런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번에 우연히 칸트 전집 논쟁 관련하여 교수들이 한겨레에 기고한 것들 모음을 보았다.
앞서 말하지만, 나는 철학 전공도 아니고, 당연히 칸트 전문가도 아니다.
칸트에 대한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
딱 교양 수준으로써, 수업이나 ,유튜브, 브런치 정리 글들을 통해 칸트에 대한 굵은 칸트 철학에 대해 알 뿐이지만,
그렇기에 새롭고, 너무 재미있게 보았다.
이 논쟁을 소개하고 싶다.
마지막 기고글인 12번 기고 링크.
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51663.html
난 7번 기고, 서울대 백종현 교수님의 글을 처음 보고, 그 후에 나머지 글들을 차례로 읽었는데,
내가 정말 감탄한 건, 교수님들의 주장과 반박이다.
진짜 분야에 정통한 교수님들, 특히 철학 교수님들이라 그런지,
양 측 다 주장과 반박이 참 논리적이고, 능하다.
양측에 약간의 인신공격이 들어가는데, 이게 최대한 절재하려하다가, 마지못해 세어나온 느낌을 준다.
진짜 파토스를 잘 이용할 줄 안다는 느낌을 받았고, 주장과 반박이 정연해서 읽기도 좋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백종현 교수님이 당연히 화낼만 했고 사과받을 만 하다.
한국칸트협회에서도 이에 수긍한, 협회 공인, 정본, 최초라는 말을 철회하는 것을 당연한 처사라고 본다.
하지만, 난 이 출판의 번역과 의의는 환영한다.
(오히려 김상봉 교수님의 아프리오리 = 선험적, 트란스젠덴탈 = 선험론적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는, 아 그냥 트랜스젠덴탈은 초월적이 직역이니까, 직역으로 쓰면 되지 않냐 생각했지만,
트랜스젠덴트와 트랜스젠덴탈이 초험적, 초월적, 초월론적으로 다중 번역 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직역이 아닌, 왜 표지판을 단 것 마냥 번역을 하냐는 반박에는,
김상봉 교수님의 반박글에서 트란스젠덴탈을 칸트가 처음 사용하게 된 유래에서, 나름 납득할 수 있다고 보고,
제일 한국에서의 초월의 의미와 헷갈릴 필요도, 초월자를 생각하게 될 필요도 없으니, 좋은 번역이라 생각한다.
또 칸트의 저서에서,
트란스젠덴탈이 정말 초월(트란스젠덴트)의 형용사형으로 쓰일 때는,
그 경우에는 각주를 붙여서, 칸트가 그런 초월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
이러면 독자들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되고, 칸트의 의도도,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다.
개인이 번역한 부분마다, 약간은 상이한 번역을 쓰는 것도, 어느정도 규정만 있고, 미리 공지한다면,
크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또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출판을 통해, 가독성이 좋아지는, 물론 원서와는 백종현 교수님이 가까울 수는 있지만,
접근성이 좋아지는 것은, 전공자가 아닌 나는 참 환영이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그냥 혼용하지 않고, 초월로 쓰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난 외국 노래를 어줍짢게 한국 정서로 해석하는 걸 정말 싫어하고, 무조건 직해하는 것을 좋아한다.
작사할 때 쓴 시 같은 노래들이,
단순함으로 바로 파괴되거나, 한국 정서로 바꾼다고 우리 식 표현을 쓰는 데,
오히려 그런 부분 때문에 얻어갈 상식이나 배경이 날아가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하지만, 협회 내부의 일은 참 모르겠다.
분명 백종현 교수님의 번역본에 대해, 아프리오리와 트란스첸덴탈의 한글 해석에는 학자마다의 여러 의견이 있고,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꽤나 골이 깊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왜 도대체 이 둘 간의 관계는,
"백종현 교수님을 포함해 공동 작업을 하여, 더 발전하여 칸트 전집을 편찬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최고의 시나리오로 되지 않았던 것일까.
분명 백종현 교수님에 대한 협회의 밑작업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과연 협회는 밑작업을 할 수 밖에, 쳐내고 작업할 수 밖에 없었던 걸까.
백종현 교수님은 전집을 혼자 편찬하기로 해서, 용어에 대한 고집을 굽히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협회가 선듯 말하기 뭐해서, 따로 만든 걸까.
물론 그것을 떠나서, 출판사에서, 백종현 교수님의 저작을 까내린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두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한, 이건 모순된 실수를 범했다.
학회라고 주장할 거면, 백종현 교수님의 원저가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하지 말았어야 상도덕에 어긋나지 않고,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거였음, 학회라고 말하면 안됐다.
백종현 교수님 말대로, 학회이기 때문이다.
학회의 큰 부분인 백종현 교수님을 비난하면서 학회에서 낸 책이라 쓰는 건, 제 얼굴에 침 뱉기이다.
학회의 이름을 쓰면, 학회 정발이 되기 때문에, 학회 일동 소수의 의견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한국칸트협회 쪽의 몇 개의 기고글을 보고, 정치적이기만 하고, 상업적 목적이라기 보단
학문 발전에 임하는 마음으로 한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면, 공격적이고 파격적인게 아니라, 더욱이 조심스럽게,
독자들에게 전집을 협회 측 일부에서 따로 만드는 이유와 차별점을 소개하면,
많은 독자들이 환호하지 않았을까.
3 비판서를 꽤나 길고 깊게,
가언 명령과 정언 명령, 인간을 수단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것 등등,
이거 잘 정리한 블로그였나 브런치였나 글을 작년 초 쯤에 봐서 다시 읽어보려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못찾겠다...
다음에 좋은 글을 찾으면, 칸트를 정리할 겸 포스팅 해야겠다.
난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말을
너무나 좋아한다.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것과 뜻이 통한다.
하지만 더 높은 경지이다. 의지의 준칙이 아예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다니.
또 목적 왕국의 입법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내가 가끔 상상하는 죽어서 신앞에 선 나를 상상하게 한다.
떳떳하게 살아서, 나름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래, 부끄럽지 않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