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에타/같이 읽어요, 시와 문장들 1
1.
사랑해. 그거 하나로 저 암흑 속에서 버텼어.
/윤현승, 하얀 늑대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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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보니, 하얀 늑대들은 판타지 소설이다.
읽어보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인지도 모르나 장면이 상상이 간다.
어떤 인물이, 사랑하는 이를 끝내 다시 만나
처음으로 하는 말이 아닐까?
전혀 오글거리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솔직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는 이와 듣는 이, 둘 다 얼마나 행복할까.
2.
너는 가고
가고 남는 이것만으로
너무 많은 너를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
/장석남, 돌의 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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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갔다가 오면, 엄청 많은 무언가가 자신에게 남는데,
정이 가는 이 무언가를 처리하는 것이 왜이리 아픈 건지
이를 어떤 식으로 이름 붙힐 수 있을까.
추억? 미련? 후회? 뒤끝? 이별의 아픔?
아직 정확한 용어는 없는 듯 하다.
3.
내 몸에 선명하게 새겨진 너를,
내 몸 속 생생한 기록이었던 너를,
오래도록 내 행복과 불행의 주문(呪文)이었던 너를
오늘 힘주어 지운다
사납게 너를 지우며
너와 섞여 내가 지워지는 이 참상
이제야 깨닫는다
너를 지우는 일은
몸이 부서질 듯
나부터 지우는 일임을
지워야 할 너의 자취만큼
내 몸엔 베어먹힌 사과의 퀭한 이빨자죽!
종이에서 그득 털어내는 나의 부재(不在)
/이선영, 지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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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새겨진 것을 지운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기억들, 생각들을 지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일이니.
마음대로 깔끔히 지울 수도 없고, 또 어디까지 지워야하는지도 어려운 고민이다.
그래도, 닳아 없어지는 지우개보다 나은 점은,
다시 자랄 수 있는, 신기한 지우개라고 믿는다.
4.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최승자,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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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본 프로그램에 나왔던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시이다.
어린 자신에게 말하는 영상 편지였는데,
여자친구가 젊은 날에 죽고, 계속 그녀만을 기억하며 독신으로 살아가는 아저씨였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사랑한다 전해달라 했다.
음, 사실 이보다, 내가 금사빠라 그런지,
엄청나게 이상형인 사람인데다가 엄청 말이 잘 통하면, 그런데 그냥 지나가는 인연이면 아쉬울 때가 많다.
만약, 잊지 못할 정도의 최선으로 자신에게 맞는 이상형인데,
다시 연락할 껀덕지 없이 혼자 아파한다면, 용기를 내보는 게 어떨까.
만약 연락할 방법이 없다면, 아쉽지만 실컷 아파하다, 새로운 사람을 찾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어떨까.
5.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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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꿈에 사랑했던 사람이 나올 때가 있다.
싸우는 기억, 나쁜 기억이 나게 하는 꿈은 그나마 다행이다.
행복한 기억만, 애뜻한 감정만 떠오르게 하는 꿈을 꾸는게 문제다.
사랑할 때 내 나쁘고 더러운 행동을 비꼬듯 행복하기만 한 꿈.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깔린, 균형과 담담함.
이별 후에도 여전히 태연히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삶.
그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는 사랑했던 그 순간을 행복하게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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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해 더욱 흥미를 느끼게 했던 것은,
우리 대학교 에타의 같이 읽어요. 게시판이었다.
이 게시판의 오늘의 시라고 하면서 시를 꾸준히 올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참 좋은 시를 많이 접했다.
이 게시판에 올라온 시들로 짧은 리뷰를 할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역시 좋은 시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