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더 크게 부를수록 고요해지는
거짓이 되어버린 말들과
그리움이 되어버린 시간들
불현듯 너는 떠났고
허락도 없이 그리움은 남았다
앉거나 걷거나 혹은 서 있을 때도
내 안에 투명한 방울들이 맺히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 되었고
기억하는 것은 떠난 것이 되어 있었다
내 삶에 낙서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름
어디로 가야 다시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물들기 쉬운 어리석은 사람
한 번의 입맞춤을 위해
힘없이 떠나보낸 시간들을 기억해본다
쓸쓸히 왔던 길은 돌아서듯 너를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혹 당신이 아니라는 착각
하지만 그래도 후회할 수 없다
뼈가 부서지도록 아픈 이름을 안고
너라는 끝없는 절망을 시작했다
/이선명, 다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길어도 쉽게 잘 읽히고 와닿는 시, 헛된 연이 없게 느껴지는 시.
이 시인이 고마워지고, 좋아진다.
21.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도 남는 날은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나태주, 사는 법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목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2.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려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 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장이지,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명왕성에 지나간 것들이 살아가는 심상.
우주, 별, 행성은 어떻게 이렇게 추억과 잘어울릴 수 있을까.
다른 행성에 갔다온 인간은 아직도 없는데..
정말 우린 별의 아이라서 그런걸까.
우스운 상상인데, 실제를 상상하듯 자연스러운 것이 너무 신기한 시이다.
내가 했던 선택에 대한 고민들, 쓰다 지운 편지, 고심했던 문장들, 추억들
우주 어딘가에 저장되는 게 아닐까.
이 시는
후회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아야할 힘을 준다.
내 지나간 것들에게 돌아올 날이 올 때
멋쩍게 웃으면서 돌아가고 싶다.
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23.
잠시 잠깐, 너를 사랑해서 미안했다
네가 나를 영원히 꿈꾸지 않는 걸 알면서도
너를 사랑해서 정말 미안했다.
이슥한 밤의 정적, 가느다란 호흡에
함께 섞인 신음소리 처량하다
내 모든 기억은 왜 이렇게 슬퍼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너를 잊어주기까지 나는
그리움을 모르는 이 아니었는데...
서로 반쪽이라는 걸 알면서 이별을 해야 하는 나는
꿈속에서도 울었다.
잊어야만 하는데
결코, 너를 잊어줘야만 하는데
너를 잊어주기까지 울고 또 울어도
깨진 유리잔엔 흔적 없을 눈물뿐이다.
반쪽으로 살아야만 하는 생에
세상의 인연들은 참으로 요란했다.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다면
내 심장에 고인 눈물 말려버리고 싶다.
내 심장을 차라리,
깨뜨려버리고 싶다.
결국 사라지고 말
미숙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사랑을 증오한다.
너를 사랑해서 정말 미안했다
너를 잊어주기까지 나는 꿈속에서도 울었다.
/강태민, 너를 잊어주기까지 나는 꿈속에서도 울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너를 잊어주기까지'라는 말이 너무 생소해서, 여러 번 읽었다.
너를 잊어주기까지 라는 말이 좋아져서, 그냥 여러 번 되뇌었다.
잠시, 잠깐, 너를 잊어주기까지
24.
오늘은 웬일인지
네 생각이 나지 않았다며
우습게도 네 생각을 했다.
/나선미, 오늘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참 처음 알게 됐을 땐 엄청 꽂혔던 시인데,
다시보니, 전 처럼 많이 와닿지 않는다.
근데, 뭐 이런 것도 좋다고 본다.
나는 아이돌 노래도 필요하고, 명반도 필요하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오래도록 좋다고 무조건 좋은 것일까.
어떤 복잡한 사고를 거치게 하는 시만 좋은 것인가.
세상이 다 복잡한 작품성만 가진 노래만 있으면 얼마나 지겨운 세상일까.
계속 듣긴 지겨운, 시원한 아이돌 노래도 매우 소중하다.
군대에서 하상욱 시집을 진짜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누구는 시가 아니라하지만, 자신이 시라는 데 뭐가 중요한가?
그의 시는 다른 시에선 찾기 힘든, 확실한 신선함, 창의성이 있었다. 여운도 있었고.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살렸을 뿐.
25.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문정희, 목숨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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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를 읽으면,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을 다시 하고 싶다.
없이 죽고 못사는 사랑.
최근에 꽤 사람을 만났으나,
다들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서성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배신감을 느끼고, 급격하게 피곤해진다.
27.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그래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건조한, 잘 지내는 삶으로 슬픔을 말리는 것.
아 좋다, 아 맛있다.
정말 좋고, 맛있는 걸까.
매 연마다
아 보고 싶다. 가 숨어있는 시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끝났다.
여기서 가끔 시를 보며, 시와 친해졌고, 좋은 시를 많이 소개해주었다.
20년 7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 게시판에는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
글 작성자에게 잘 읽고 있다고, 작년인가 쪽지를 보낸 기억도 있다.
좋은 시와, 구절을 많이 알아간 것 같다. 다시 읽어봐도 참 좋다.
굳이 시를 외우고 싶진 않다. 어차피 1년이, 2년이 지나면 까먹을지 모른다.
시를 읽은 여운이 생각보다 엄청 오래 간다 .
시는 좋은 점이, 과거를 불쾌하게 되짚는게 아니라
결국 그냥 다 괜찮다고 말해준다. 다 그런거지, 다 아파하고 다 괜찮아지겠고,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풍경이라고.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나도 이번 기회를 통해, 내 명왕성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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