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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좋아하는 시

내가 너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나태주, 내가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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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냥 철 없는 소리라던가, 

인생은 그렇게 살면 손해니, 허비라던가,

논리적이지 못하다던가 등등

자신이 정답임을 확신하며 언성을 높혀 이건 아니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여러 종교의 수도자들은

인간, 인간의 삶, 감정의 심층 구조에 대해 연구한다.

난 이런 문장들이 구조의 상부에 있다기보단, 구조의 기저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하부의 반석 위에, 표층까지 쌓여져 있는 것이라,

참 재밌는게, 모순적으로, 이런 문장들은 상당히 범용적이지 않아보이고,

오히려 통용적인 지혜와는 반대의 답을 주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여러 신화들에서 복잡한 사유가 몇개의 재미난 비유와 에피소드로 나타난다.

 

일단 처음 시를 읽으면,

'너'라는 대상이 찼든, 헤어졌든, 사별이든, 어쨌든 떠나가도,

남은 추억이나 기억들 때문에 '너'를 좋아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게 우리가 처음 접하는 최상부의 표면이라고 생각해보면,

조금 더 하부로, 초월적인 부분으로 내려가보자.

 

인식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다가가보자.

일단, 대상이 없는 것(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니다. 사랑에는 대상이 필요조건이다.

이 시에서도 대상은 '너'로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너 없이도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가 없이도'라는 말을 '인식할 수 없어도'로 바꾸어보자.

 

'인식되지 않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명제를 보자.

여기서 인식이란 말은, 인간의 오감 뿐만이 아닌,

인류가 오감을 이용해 논리적으로 찾은, 증명한 모든 지식,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은 그럴싸해 보인다.

이 명제는

'존재하는 건, 모두 인식된 것이다.' 와 같다.

그럼 쿼크의 존재를 발견하기 전에는, 세상은 쿼크가 존재하지 않았나?

쿼크의 발견으로 세상의 입자가 한번 더 쿼크로 쪼개진 것인가? 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예는, 잘못된 반박이다.

아직 쿼크가 발견 전에 인식받지 못한 것일 뿐이지,

과학적 사실을 통해, 이제야 인식된 것임으로, 원래 존재하던 것이다.

즉 쿼크는, 아직 인식되지 않고 있던 것이었을 뿐,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인식된 것과, 아직 인식되지 못한 존재들, 두 가지 존재로 파악되어진다.

이들의 입장에서 '인식되지 않으면서(아직 못한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것은 반박 할 수 없다. 

인식은 말 그대로,

사람의 인식 너머의 무언가를 사람은 알 수 없으니, 판별하는 것도 불가능 하다.

즉 증명할 어떤 예시를 드는것이, 반증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이 말의 역

'인식되지 않음에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라는 명제 또한 반박할 수 없다.

이에 어떠한 반례도 들 수 없고, 당연히 반증 불가능하다.

현대의 과학은 이런 반증 불가능성이 과학적, 비과학적으로 나누게 하는 지표이고,

과학이라 칭하려면, 현상에 대한 반증이 가능해야 한다.

 

 

 

그럼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도대체 왜

'인식되지 않음에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할 필요성은 무엇인가.

왜 이 필요짝에도 없어 보이는 걸 고민하고 논의 하는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극히 미세한 현상으로도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 존재는 인간에게 그 자체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인식되지 않음에도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초월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 이 시에서, 또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다뤘던 근본 이유는,

인간이 삶에서 한번은 하는 생각이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 생명의 삶의 목적에 대한 이유다.

인간이 삶의 목적을 고민하면서 하는 생각은 결국

1. 목적은 아직 발견 되지 않았지만, 존재 한다던가,

2. 목적은 인식되지 않았지만, 존재한다.(초월해 있다.)

3. 목적은 없다.

 

인간의 삶의 목표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 초월해있기 때문이고,

인간은 삶을 통해 이걸 고민하면서 실존적 불안을 겪는 동물이기 떄문이다.

사피엔스나 이기적 유전자를 유튜브 요약으로만 보거나, 생각없이 읽었다면

인간의 목표는 유전자를 후대에 옮기기 위해서라고, 이미 발견되었다고

진화심리학을 이용해 설명할지도 모른다.

이건 인간의 목적을 제대로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럼 유전자의 목적의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것은, 유전자를 후대에 옮기기 위한 쪽으로 진화했다는,

과학적 진실, 생물의 보편적 현상 뿐이다.

왜 유전자는 그렇도록 창발되었는가, 끝없이 환원시킨다면, 제 1원인은 무엇인가.

 

초월적인 것의 대표적인 예는 신, 도덕, 인류애, 사랑 등이 있을 것이다.

신을 믿는(만들어진) 이유, 도덕의 탄생이유, 인류애의 이유, 사랑의 이유를

종족 번식과, 진화로 설명 가능하다.

이것들이 어떤 수단이 되어 사용됐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가치를 초월적인 것에 도약시키고,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적인 것으로의 던짐, 가치의 격상은 각각의 개인에게 엄청난 삶의 힘을 준다.

이유는 당연하다, 인간은 원래 목표가 없이 태어났으니, 목표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사실 이런 도약에는, 돈이 주가 될 수 있고, 섹스가, 뭐 어떤 욕망이든 뭐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몇 만 년에 걸쳐, 어떤 것을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지에 대해 실험에서

목표할 것, 초월적인 영역에 가장 어울리는 건  

신(믿음), 도덕, 인류애, 사랑이었다.

이게 보편적 삶의 목표라 확언은 당연히 할 수 없으나,

이걸 물려받고, 다듬으며 후대로 주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 뿐만의 생각이 아니라, 왠만한 사람이 들고 있는 물려받은 감정이다.

 

실존주의자들은 3번, 목적이 없다를 말하면서도,

대부분의 실존주의자들은

목적이 없으니, 죽어도 상관없다를 주장한 것이 아닌, 이런 가치의 초월성으로의 격상을 요구했다.

키르케고르의 신뢰의 도약,

샤르트르가 삶의 목표가 없음에도 앙가주망, 실존을 성취하는 일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도스도예프스키가 도덕성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연관성을 이야기 한 것도 이런 범주이다.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의심하기도,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적인 삶으로 입는 손해에 고민하기도,

인류애를 굳이 들고 있을 필요도,

사랑을 굳이 할 필요도,

 

결국 이게 실제로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초월적인 가치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 소중한 목표와 기준이 된다.

너가 없어도(인식하지 못해도), 그 초월적인 가치를 좋아할 수 있다.

이런 가치가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못하든 상관 없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 하니까. 

 

무논리하고 혼돈으로 가득찬 세상.

전혀 가치가 없어보이는 걸, 자신만의 굳은 신념으로, 나만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큰 행복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몇 만년 동안 물려받고, 계속 나아가게 해야 할 지혜이다.

그 가치들이 사랑, 도덕, 인류애라는 것도 정말 선조에게 감사해야 할 축복 아닐까.

이 자체가 신이 준 가장 큰 메세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