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어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문정희, 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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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꽃이 될 수 있었는데, 결국 가시가 되버리면 너무 아프다.
가시가 자란 내가 밉고, 마찬가지로 가시를 세운 상대가 밉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신의 가시를 점점 키운다.
이 슬픈 현상을 시인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시는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어있을 이름
과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이 연이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라는 말이 너무나 좋았다.
보통 꽃을 칭송하나, 이 시는 가시가 중점이 된다.
이 시는 어떤 풍경을 준다.
뭔가 연약하고, 언젠간 질 것 같은 꽃이 아닌,
영원한 초록일 것 같은, 단단한 찔레의 가시.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는 것.
어릴 때 산에서 놀아본 사람이라면, 어떤 느낌을 말하고 있는지 알거라 확신한다.꽃이 주는 느낌보다 더 좋을 때가 많았다.
서로에게 꽃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어떤 것에, 자신만의 가시를 가진다는 것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자신의 가시를 떼어버리려 애쓰지 않고,
지나간 사랑 자체를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17.
우유 사러 갈게, 하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여자가 있다
생각해보니 여자는
우유 사러 갔다 올게, 하지 않고
우유 사러 갈게, 그랬다
그래서 여자는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왜?
슬픔은 뿌옇게 흐르고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니까
나에게 기쁨은 늘 조각조각
꿀이 든 벌집 모양을 기워놓은 누더기 같아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말
지금 기억나는 말
그때 무얼 하고 있었지?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조각보로 덮어둔
밀크 잼 바른 토스트를 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재방송 드라마가 하고 있었고
주인공이 막 오래된 마음을 고백하려는 중이었다
고백은 끝나고 키스도 끝났는데
우유 사러 간 여자는 영영 오지 않았다
벌집모양 조각보는 그대로 식탁 한구석에 구겨져 있고
우유는 방 안 가득 흘러 넘쳤다
/유형진,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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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는 당황스럽다.
인과를 제외하고 감정을 남기는 시.
철저하게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는 나오지 않고, 그냥 덩그라니 결과와 했던 말이 남아있다.
인과가 없는데 감정만이 떠도니, 이게 뭐지? 하면서 단어 하나하나, 인과를 찾는데 집중하게 된다.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이건 우리가 세상을 접하는 방식과 같다.
남겨진 결과와 말로써, 뜻을, 원인을 찾는 방식.
인과를 숨김으로 강조한 시는 모 아니면 도인 것 같다.
많이 와닿거나, 많이 구려보이거나.
이 시는 나에게 많이 와닿는다.
여자는 왜 떠난 걸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건,
남자는 티브이에 나오는 재방송 드라마에 집중했고,
여자는 남자 주위의 우유잼과, 우유, 벌집모양 조각보를 보며
떠나기 전,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에 비유했다.
여자는 우유를 마시는 그 남자를, 우유를 사러 가겠다며 떠나갔다.
우유와 꿀을 넣어 만드는 우유 잼,
많은 슬픔을 주고, 기쁨에도 슬픔이 덩어리 진 남자를 떠나갔다.
더 썩어서 냄새가 고약해지기 전에,
조각 조각 찾을 수 있는 일상의 기쁨을 찾기 위해.
남자가 재방송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건 남자가 여자에게 오래된 마음을 고백했을 때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 연상이 된다.
여자가 떠나가기 직전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그 때를 회상하며, 그 때를 추억하며 바라본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백은 끝나고 키스도 끝났는데
우유 사러 간 여자는 영영 오지 않았다.
전에 고백을 하고, 키스를 한 것을 회상하나,
그렇다고 여자가 떠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슬픔을 찾아 갔고, 남자도 우유 속에 빠졌다.
기쁨은 구겨져서, 덩그러니 식탁에 올려져 있다.
이건 어떤 남녀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현재 상황을 크게 중요하게 보지 않고, 과거를 추억하는 남자,
과거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현재의 감정, 기쁨과 슬픔이 중요한 여자.
남자의 입장에선, 당황스런 갑자기이고,
여자의 입장에선, 당연하고 타당한 서서히였을 것이다.
이는 재방송 드라마를 보며, 그 때 뭘하고 있었지? 묻는 남자로
감정을 현재의 물건으로 비유하며, 떠나간 여자에 비유된다.
남녀가 다른 보편적인 특징은 예로부터,
신화나 시, 소설에서 많이 다루는 아이러니이다.
특히 이런 인과가 없는 시로 표현함으로써
어떤 해결이 생각나기보단, 어쩔 수 없이 슬픈 그런 느낌을 잘 표현한 시이다.
리뷰를 해도 뭔가 공허하고 답답하고 슬프다,,ㅠ
여자들과 얘기해본 결과, 상대적으로
남자는 계속 생각하는 반면,
여자는 오히려 꼴도 보기 싫어진다하더라.
나도 꼴도 보기 싫어졌을까.
18.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문정희, 비망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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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좋은 사람을 만난 적 있는가.
난 내 인생이 너무나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난 참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자부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은 내 안에 숨겨진 나침반을 찾게 해준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방향을 알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이게 세뇌인지 아닌지, 꽤나 깊게 고민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지는 생각이 사이비 신도가 사이비 종교에 세뇌당한 것과 차이는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차이를 찾기 쉽지 않았다.
결국 목적 없는 인생에서 어떤 초월적인 가치추구를 한다는 것은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는 도덕과 사랑, 인류애같은 좋은 것이라 칭해지는 것도,
사이비 종교와 다름없는 우습고 위험한 생각이라 취급한다.
내가 그나마 찾은 차이는,
사이비 종교는 최종목표를 칭송하고 한계가 정해진 반면에,
내가 믿는 것은, 존경함과 동시에 이 사람보다 더 나아간 너머를, 내가 할 수 있다고 엄청난 희망을 준다.
뭐 어쨌든, 우리는 어떤 것에 어차피 미쳐사는 것 아닌가.
초월적인 가치가 보편적으로 인류가 추구했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은
나의 엄청난 행운이자, 행복, 자랑이다.
이것을 들고 있음을, 이 내재된 것을 공명하며 깨닫게 해주는 사람은
정말 엄청난 행복을 준다.
하지만, 정말 슬픈건, 이 정도의 사람은, 그렇게 많이 지나가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보면 나머지 사람은 극도로 시시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표정에서 티가 나서 문제이다.
좋은 무엇을 발견하면, 그 외의 것이 상대적으로 시시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때도,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할 때도,
"아 그 사람이라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 아, 이 사람이었다면,, 아쉽네"
물론 사람은 신이 아니니 누구나 단점을 들고 있고, 누구에게도 배울 점을 얻는다는 것이 현인의 길이라 한다만,
파라미터가 다 월등한 사람을 보다가, 시시한 사람과 만나면 기가 빠지고, 재미없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운 나쁘게, 주위에 시시한 사람들만 모인데에 가면
차라리 내가 좋은 걸 몰랐다면,,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건 마치 돌처럼 가슴에 박혀서, 이런 사람을 또 찾으라고
또는 이런 사람과 같이, 혹은 너머가 되라고 허둥되게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책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다.
책은 검증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수단이다.
19.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사막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류시화가 엮은 시집에 소개된 시이다.
류시화가 직접 시의 엮음을 허락받기 위해, 찾아가서 시에 대해 들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신기하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짧지만, 참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장소, 주어, 주어의 감정, 동사의 이유, 빈도, 동사의 방법
하지만 왜 외로운지는 적혀있지 않다.
사막 - 오르탕스 블루
사막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désert Hortense Vlou Il se sentait si seul dans ce désert que parfois il marchait à recul..
poetryreader.tistory.com
우연히 어떤 블로그를 보게 됐는데, 그러게, 방금 걸어간 발자국조차 볼 수가 없네.
아무 발자국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자,
사막을 걷는 이에게는,
자신이 갔던 길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이다.
누구나 한번씩은 자신만의 사막을, 발자국 없는 사막을 걷지 않는가.
하지만
평생 홀로 사막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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